반응형
멜라니아 트럼프 영부인 연설 동영상 + 멜라니아 미국 반응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방한한 멜라니아 트럼프 영부인의 연설(미대사관주최)이 있었습니다. 

최근 멜라니아는 해외순방에서 환한 미소와 우아한 모습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데요 미국내에 있을때는 로봇같다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어색해 비난여론이 많았던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멜라니아는 트럼프의 세번째부인이고 현재 아들 교육문제로 백악관에 거주하지 않고 사실상 맏딸 이방카가 영부인 역활을 하고 있었는데 해외순방에 멜라니아가 따라다니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트럼프 대통령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70relee

정말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영부인이야.

   

 


Andrew Andy

한국아이들이 멜라니아 여사를 진짜 좋아하네!


  


ghost

역시 멋진 미국의 영부인!

  


DJ H

한국 아이들에게 저리 환영받다니. 내가 다 흐뭇해져!




Barelythere Skinwear

나도 한국 아이들처럼 멜라니아 여사가 좋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부인이기도 해! 마음이 따뜻하고 진실해 보이거든.




Donna Ferdinando

안과 밖이 모두 아름다운 영부인!




misspuppa

사실 영부인이 무척 아름다워서 보기만해도 좋긴 하지.

   

 


Robert Wahinehookae

트럼프 부부는 모두 마음에서 우러난 연설을 해줬어. 

미국이 제대로된 대통령을 뽑아줘서 고마워. 다음에도 트럼프를 뽑자!




Andrej guesswho

내가봐도 사랑스럽다.

   

 


Lady Pearl

정말 제대로 된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있어. 언제나 지금처럼 잘 해주길!



   

   

Grace Bertrand

근데 왜 멜라니아가 연설하게 한거지?

  

  



Margaret S

영상으로 보는 내가 다 흐뭇해진다!




steve Baish

정말, 이제야 백악관이 제대로된 느낌이야.




Pam Johnson

멜라니아 여사! 대통령과, 나라와, 아이들과, 군인을 사랑해주고 있지!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으로 많은 일을 해내고 있어.




Gloria

멜라니아, 고마워요. 한국의 동계올림픽을 기대합니다. 

전쟁 없이요.

 



Stay Patriot

혹시 멜라니아 여사는 한국말을 해?




Gandhi Mahatma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스마트하단걸 보여주는거야. 

그의 와이프인 영부인도 기품을 타고난 여왕같고, 

딸인 이방카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지. 신께서 우릴 축복하시는거지.

 



leos rule

나 사실 멜라니아 여사가 말하는거 첨 들었어. 

생각보다 훨씬 우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야. 연설도 잘 했고. 

마치 영화속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어.

   

 


Gandhi Mahatma

이번에는 누구의 연설문을 훔쳐 썼을지 궁금하네.




Locket

정말 클래식한 영부인이야! 게다가 아름답고! 

저런 반응을 받는 걸 보니 내가 다 자랑스러워져.




Duke Ofhesse

오, 정말 많은 환영을 받고 있구나. 

영부인의 얼굴에 보이는 미소와 우아함도 멋져.




Oved G.

너무 로봇처럼 말하는데?




YGY 

한국은 빚이 더 많아지겠지!


 


Paris Belle

멜라니아는 말도 참 예쁘게 하고, 여성스럽다. 

나라도 한국 학생들처럼 그녀를 좋아했을거야!




AndySaenz

멜라니아의 말이 맞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모두 동등하지. 

하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다 그런 관념이 자리잡진 않았어. 

그런 스포츠맨쉽을 전세계의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해.




MAGA FARMER

얼마나 똑똑한가보단 얼마나 예쁘냐는 소리가 더 많이 들릴 것 같아.




Patty Cakes

내가 영부인이 참 좋다고 느낀게 40년만임. 

미국을 많이 사랑한다는게 느껴져.





jacare bravo

반응하는 학생들이 너무 귀엽다!

   

 


richie owen

저기 있는 관중들의 대부분은 멜라니아의 

몸매 사진을 인터넷에서 봤을거야. 그러니 몸매가 좋다며 좋아한거겠지.




ㄴSc C

너 진짜 멍청해보인다 ㅋㅋㅋ




ㄴcbes2407

꼭 여자라는 걸 그렇게 말해야하니? 

여자이기 전에 멜라니아 여사는 미국의 영부인이야. 

그러니 멍청한 소리 그만 말고 꺼져.


 


AndySaenz

와우,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가 이제 어떤 영부인의 역할을 하는지 잘 알겠어. 

미국을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는 모습이 참 자랑스럽다!




Dakota Strong Dakota

멜라니야 여사는 진짜 우아해보여. 

아름답고, 고상하고 처음에 걸어나올때도 진짜 천사같아.




ㄴMichael Shapiro

내가 아는 영어의 "천사"가 다른 뜻이 있던가?




ㄴM99980

혹시 멜라니아 여사세요?




carl os

한국 아이들 반응에 나도 웃었어!

  



Holyloveaffair

이런 반응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나님께도 감사해.


 


Oil Oil

멜라니아 여사는 완벽해. 

안티들도 멜라니아 여사까지 어찌하진 못해. 너희가 기품과 고상함을 알긴 아니?




Mt. Zion

내가 이래서 멜라니아 여사를 항상 믿었다니까?




sina mumuta

모습도 아름답고, 절로 존경스러워져.




Welsh Gemstone

연설도 진실하고 솔직해보여. 

나도 한국 아이들처럼 멜라니아 여사의 모든게 좋아.




Lori Walker

나도 이번 연설을 보고나서 한국인들처럼 그녀가 좋아졌어.


 


Ewa Zizemska

우리도 한국 아이들처럼 멜라니아 여사가 좋아!

   

 


JJ Cevering and Jay

저렇게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까 더 밝게 빛나는 모습이야. 

그게 그녀의 재능인가봐.




Lucie Hunsel

진짜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부인이야. 

미국은 멜라니아 여사가 있어서 자랑스럽겠어.



번역기자:그린별 

해외 네티즌 반응

가생이닷컴 www.gasengi.com

위 출처의 변형,삭제등은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가생이닷컴 모든 번역물의 2차 가공,편집등은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트럼프 국회연설 동영상 - 국회방송 생중계

방한중인 트럼프 대통령 국회연설 생중계 영상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이명박 아들 이시형 왜 다스 중국법인 대주주가 되었나?


최근 시사의 가장 큰 이슈가 바로 다스 실소유주 이다.


다시 실소유주 의심을 받고 있는 MB 이명박의 아들 이시형이 다스 중국법인 대주주가 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단 다스 지분 구조는 이명박의 큰형 이상은이 46.8%를 보유하고 있다. 


그외에 이명박의 집사 역활을 했던 故김재정 처남이 44%를 갖고 있었으나... 사망 후 상속세로 기획재정부에 19.7%를 주식으로 냈기 때문... 


2018/01/26 - [사회] - 영포빌딩 비밀창고 압수수색, 검찰 다스 증거자료 찾고 이명박 피의자 신분 전환 되나?



2017/10/26 - [사회] - 윤송이 부친(김택진 장인) 타살 의혹

2017/10/25 - [연애?연예?] - 디스패치 조덕제 사건 메이킹필름 공개

2017/10/24 - [스포츠] - 최대성 박시현 결혼 발표, 프로골퍼출신 박시현 사진 모음

2017/10/16 - [사회] - 다스 실소유주는 누구? [김어준의 파파이스#162] MB특집[2] 자원외교 그리고 다스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통해 밝혀진 내용으로는 다스만의 특이한 결제 라인이 있는데 바로 합의결제라는 라인이 있다고 한다. 


합의결제 라인은 바로 상무로 재임중인 이시형의 결제로 모든 결제가 전결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대주주인 이상은도 아닌 이시형이 전결권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조카라서?





현재 이시형은 다스의 CFO로 알려져있으나 CFO가 해외법인 책임자로 발령 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윤송이 부친(김택진 장인) 타살 의혹


26일 경기 양평경찰서에 따르면 윤 씨는 이날 오전 7시 30분께 양평군의 자택 주차장 옆 정원에서 숨진 채 부인에게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윤 씨는 전날 오후 5시에 부인에게 "나갔다 오겠다"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윤 씨의 부인은 "남편 차가 없는 주차장에서 피가 보인다"고 경찰에 신고 후 집 주변에서 쓰려진 윤 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윤 씨의 차량은 이날 오전 11시께 자택에서 5㎞가량 떨어진 서종면 문호리 공터에서 발견됐다. 차 안에 블랙박스는 없었다. 자택 입구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만 주차장과 윤 씨가 발견된 정원은 사각지대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목에 흉기로 찔린 것으로 보이는 외상이 있는 점 등을 미뤄 "일단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용의자는 특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현재 사건을 자세히 수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윤송이 엔씨소프트 사장은 2004년 엔씨소프트 사외이사가 되면서 인연이되었고 2005년 김택진이 전부인과 이혼하고 2007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김택진 전부인인 정모씨가 받은 위자료는 300억 상당의 금액으로 알려졌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에이즈 증상 및 원인, 치료 방법 은? - 부산 에이즈 논란


부산에 거주하는 에이즈 보균자 여성A가 성매매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남성과 관계를 맺은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동거남 B씨는 A씨가 에이즈 감염자임을 알고도 알선자로 나섰다고 한다.


에이즈 원인


HIV가 원인이다. HIV 바이러스는 HIV-1과 HIV-2로 나뉘는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HIV 감염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HIV-1이다. HIV-2는 주로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분포되어 있다. HIV-1은 유전적인 특성에 따라 다양한 아형(subtype)으로 나뉘는데 이러한 아형들은 지속적인 유전적 변형을 통하여 그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 HIV의 감염경로는 성적인 접촉, 수혈이나 혈액 제제를 통한 전파, 병원 관련 종사자에게서 바늘에 찔리는 등의 사고로 전파되는 경우, 모체에서 신생아에게로의 전파 등이 있다.




에이즈 증상


HIV 감염의 증상은 감염 초기의 급성 HIV 증후군, 이 후에 이어지는 무증상 잠복기, 면역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기회감염(건강한 사람에게는 감염증을 일으키지 않는 미생물이 면역기능이 저하된 사람에게서 심각한 감염증을 일으키는 것)을 비롯한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후천성 면역결핍증 시기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급성 HIV 증후군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3~6주 후에 발생하며 발열, 인후통, 임파선 비대, 두통, 관절통, 근육통, 구역, 구토, 피부의 구진성 발진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 뇌수막염이나 뇌염, 근병증(근육 조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병적인 상태)도 동반될 수 있다. HIV에 처음 감염된 후 조기에 감염이 진단되지 않으면 환자 본인도 감염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HIV를 전파시킬 수 있기 때문에 초기에 환자를 찾아내어 치료하는 것이 공중보건학적으로 중요하다.


급성 HIV 증후군 시기가 지나면 무증상 잠복기가 10년 정도 지속되는데 이 시기에는 HIV 감염을 의심할 수 있는 특이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증상 시기의 지속 기간은 여러 요인에 의해 편차가 있으므로 4년 정도로 짧은 경우도 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없지만 무증상 잠복기 동안 HIV 바이러스는 지속적으로 면역세포를 파괴하므로 인체의 면역력이 점차적으로 저하된다.


면역력이 어느 정도 이하로 떨어지면 건강한 사람에게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여러 종류의 감염성 질환(이를 기회감염이라 한다)이 발생하고, 보통 사람에게 약하게 나타나는 감염성 질환도 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에게는 심각한 질병으로 나타난다. 또한 면역 결핍으로 인해 악성종양이 현저하게 많이 발생하므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에이즈 진단


혈액검사를 통해 HIV 감염을 진단할 수 있다. 혈액에서 HIV에 대한 항체나 HIV의 항원(인체의 면역 체계를 자극하여 항체를 만들어 내도록 하는 물질)을 직접 찾아내는 검사를 통해 감염을 진단할 수 있다. 국내 대부분의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혈액검사를 받을 수 있다. 특히 보건소에서는 HIV 검사 시에 검사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는 익명검사를 시행 중이다. HIV 검사를 받을 때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 적절한 시기에 진단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한 조치이다.


선별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면 감염을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 다시 확진 검사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질병관리본부에서만 이를 시행하며 웨스턴 블롯법(Western blot test)을 이용한다. 확진 검사를 하는 이유는 HIV 감염이 아니더라도 선별 검사에서 양성(위양성, false positive)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HIV가 체내에 침투한 후 인체 내에서 HIV에 대한 항체가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6주가 걸리는데 이 시기에는 선별 검사를 해도 음성으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HIV 감염의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이 시기가 지난 후에 다시 검사를 해야 하며, 최대 6개월까지 항체 생성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를 고려한다.


HIV에 감염은 되었으나 아직 항체가 생성되지 않은 경우에 조기 진단하기 위해서는 HIV 바이러스의 핵산을 직접 검출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양성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으므로 현재 표준으로 사용되는 확진 방법은 아니다.




에이즈 치료


아직까지 HIV를 완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재 사용 중인 항 HIV 약제들은 부작용이 많으므로 면역력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감염 초기에는 HIV 치료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혈액 내에 존재하는 HIV 바이러스의 수와 면역세포의 수를 주기적으로 측정하여 일정 기준에 도달하면 치료를 시작한다. 즉, 치료를 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HIV 치료를 시작한다.


항 HIV 치료제는 보통 세 가지 종류의 약을 동시에 사용하는 소위 칵테일요법을 쓰는데, 이는 한 가지나 두 가지의 약제만을 사용하면 빠른 시간 내에 내성(약물의 반복 복용에 의해 약효가 저하하는 현상)이 생겨 약의 효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작용 기전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약제들이 개발되어 사용 중이고, 약에 내성이 생겼을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약을 개발 중이다. 현재로서는 항 HIV 약제는 평생 동안 먹어야 하며, 도중에 투약을 중단하면 HIV 바이러스가 다시 증식하면서 면역력이 저하되어 각종 기회감염과 종양이 발생할 수 있다.


HIV 환자에게서 면역력이 떨어지면 여러 가지 기회감염이 발생하는데, 대상포진, 단순포진, 결핵 등의 감염성 질환은 비교적 면역상태가 양호한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환자의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항 HIV 약제를 지속적으로 투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기회감염이나 종양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몇몇 기회감염은 면역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이 밝혀져 있으므로 이에 대한 예방 약제를 투여하여 발병을 예방할 수 있다.


에이즈 예방방법


HIV 감염 경로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HIV 감염여부를 알 수 없는 상대와 성관계를 가질 때에는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산모가 HIV 감염자이면 출산하는 과정에서 태아가 HIV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 이 경우에는 임신 2기부터 항 HIV 약제를 임산부에게 투여하면 태아가 감염될 확률이 1% 이하로 줄어든다. 혈액을 다루는 의료인은 피를 뽑는 과정에서 주사기에 찔리지 않도록 안전규정을 철저히 준수하여야 한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강남역 사고 동영상, 제네시스 급발진 사고 논란? - 사고 현장 사진 포함

오늘 오후 12시 22분경 CCTV에 잡힌 강남역 인근 건물 주차장에서 나오던 차량이 인근 SPAO 의류 매장을 덥쳤다.

아래 영상은 25초부터 보세요







운전자는 급발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브레이크등이 안들어온점을 감안 이번에는 아니라는 네티즌들이 많다...


이 사고로 의류 매장 직원 등 6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사고 현장 사진 모음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다스 실소유주는 누구? [김어준의 파파이스#162] MB특집[2] 자원외교 그리고 다스

다스는 누구의 것인가...

내것이라고 하고 내가 가졌으면...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LH 공공분양부터 후분양제 도입 당연한것


김현미 국토부장관이 LH 공공분양분 부터 후분양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현재는 대부분 선분양제를 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획기적인 안이다.


야권쪽에 강한 반발을 사고 있지만 공공분양 후분양제는 당연한것으로 보인다.


김현미 장관과 여당은 제도가 잘 실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정부 정책에 힘을 실었다. 반면 야당은 인기에 영합한 섣부른 정책이라며 신경전을 펼쳤다.





선분양제 하면 집값 상승분은 소비자 이익 후분양제 하면 집값 상승분은 건설사 이익?


지난 5월 조선일보 사설에 따르면 선분양제를 하면 프리미엄만으로 1,2억을 벌기 때문에 소비자가 돈을 버는 구조가 된다고 하였다.


반면 후분양제를 할 경우 집값 상승분은 건설사가 가져간다는것이다.


그런데 왜 건설사는 굳이 선분양을 고집할까?


후분양을 하지 못하는 법적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2017/10/10 - [사회] - 신혜원 태블릿 내것 주장, 16일 박근혜 구속 만기 노렸나?

2017/10/07 - [연애?연예?] - 이동욱 지방시 패션위크 파리를 잡아먹은 이동욱의 도깨비 방망이~

2017/10/07 - [사회] - 정미홍 김빈 썰전 논란, 관심받는게 싫다면 SNS 부터 탈퇴해야...





초기 금융비용을 소비자게에 물리는 것 만으로도 건설사에게는 큰 이득


집 한채당 1,2억보다 전체 비용의 10% 정도를 소비자들에게 물리는것만으로도 건설사에게는 큰 이득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2.5억에 분양된 1500세대 가량의 아파트가 있다. 계약금 375억 만으로도 공사 착공이 가능하고 중도금을 받으면서 건설사측은 큰 금융비용을 절감하게 된다.


1억이 아닌 5천만원의 프리미엄만 분양가에 반영해도 750억가량의 큰 돈인데도 건설사가 포기하고 선분양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 비용보다 중간에 들어가는 금융비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우선 LH 공공분양분부터 후분양제를 도입한다는것은 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실제 건설사의 경우 후분양제를 강요할 경우 사업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부실건설사의 경우 빠르게 사업을 철수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여파가 몰려올 수 있을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신혜원 태블릿 내것 주장, 16일 박근혜 구속 만기 노렸나?


1. 2012년 대선 당시 사용했다는데... 기종은 2015년형


여기서 일단 말문이 막힌다.


그 태블릿은 미래에서 가져다 준것인가?


2. 박근혜 측근 태블릿을 최순실이 사용했다는것 자체가 국정농단의 증거


박근혜 무죄의 근거가 아니라 더욱 유죄를 확고하게 하는 증거이다. 


신혜원의 말이 사실이고 박근혜 대선 선거운동원의 태블릿PC가 최순실에게 쓰여졌다는것 자체가 국정농단의 결정적 증거이다. 






2017/07/18 - [사회] - 박근혜 침대 처분법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

2017/07/03 - [사회] - 국민의당 이유미 단독 범행 결론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조사 조작

2017/03/27 - [사회] - 박근혜 구속영장 청구, 검찰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영장 발표 전문


뒷북, 이런 뒷북은 없다.


사실 이런 시나리오는 작년말에 서청원의원 보좌관 정도 되는 사람이 사실은 내것이라고 들고 나왔어야한다. 


그리하여 친박 의원하나 정도 날리는것으로 마무리지었어야한다.


작은 욕심이 큰 파장으로 와진것으로 보인다. 



신혜원, 대체 왜??


사실 박근혜 구속 마감시한이 오는 16일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혜원이라는 와닿지 않는 인물이 태블릿 원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는것은 상당히 공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문재인 안동하회마을 방문해서 남긴 징비정신의 원초인 징비록이란? 


장하성 정책실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유시춘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류왕근 안동하회마을보존회 이사장 등이 함께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특히 유시춘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유성룡의 직계후손으로 잘 알려져있었다. 남동생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썰전에서 이미 안동 하회마을이 종가집이라고 밝히며 유성룡의 후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안동하회마을에 방문하면서 징비정신이라는 글을 남겼다. 징비정신은 미리 경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예기징이비역환에서 따와서 지은 책 제목으로 유성용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이다. 


어쩌면 고인이 된 노무현 전대통령때의 기억을 통해 후환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2017/10/07 - [사회] - 정미홍 김빈 썰전 논란, 관심받는게 싫다면 SNS 부터 탈퇴해야...

2017/09/28 - [사회] - 이명박 테니스 논란, 남산 테니스장 외 이명박 기무사 테니스 장에서 황제테니스 즐겨...

2017/09/20 - [사회] - 영화 김광석, 사라진 김광석 딸 서연의 행방 감춘 서해순 그녀가 진짜 감춘것은?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인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룡이 전란 당시 전황이 돌아가는 급박한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기록문학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으로서의 『징비록』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징비록』은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하여, 전란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로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는, 선조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권층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전란을 불과 1년 앞둔 1591년에는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조정의 공론을 분열시켰고 그에 따라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도 동인의 일원인 남인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상대 정파에 의해 탄핵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였지만, 전란을 회고하는 이 노정객의 안타까움과 반성의 심정은 당파적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유성룡이 『징비록』의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 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에 의해서, 생전에 쓴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보관되어 있는 유성룡의 친필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하여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 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징비록』에는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져 간행되기도 했다. 『징비록』은 1695년(숙종 21) 일본 교토(京都)의 야마토야에서 중간(重刊)되었는데, 당시 숙종 임금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일본 수출을 엄금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전란을 대비한 선견지명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전황에 대한 경과뿐만 아니라 전란 발생의 원인과 조정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 사신이 보인 오만한 태도나,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는 일본의 국서는 일찌감치 전란을 예고하는 징조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교류가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어떻게 하면 그 파장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현실화 되어가는 전란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즉, 1591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통신사 일행에게 선조 임금이 전쟁 가능성을 묻자, 통신사 대표 김성일과 황윤길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윤길과 상반된 답변을 한 이유를 따져 묻는 장면이 『징비록』에 나온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왜국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을 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일본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말하기를,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또, "황윤길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더러는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또 더러는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 때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 황윤길 - 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일본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고 하였다.


국란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지배층 내부의 당파적 증오로 인해서 조정의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을 목도한 유성룡은 전란을 대비하는 그 나름의 계책들을 선조에게 건의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조정의 인사정책 등에 반영되어 훗날 전란 극복에 커다란 보탬이 되기에 이른다. 유성룡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그리고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던 것이다.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는 전란을 대비한 유성룡의 용인술(用人術)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더불어 유성룡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정책은 바로 '진관(鎭管)체제'로의 복귀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립된 일종의 지역적인 방어체제인 진관체제는 각도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한 채 주진(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진의 육군과 수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진 밑에는 거진, 제진 등이 있어서 지역의 수령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의 진지를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병역 기피자들이 증가했고 그 때문에 병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1555년 을묘왜변을 기점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수령들이 휘하의 군사들을 전장으로 인솔해가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군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체제였다. 따라서 이 체제는 대규모의 적군과 정면 대결할 때의 병력운용 개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동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이 전장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급변하는 전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체제이기도 했다.


유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체제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강력히 건의했는데, 그 내용이 『징비록』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는 각도의 군사들을 다 진관(鎭管)에 나누어 붙여서, 사변이 생기면 진관에서는 그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정돈하고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경상도를 말하자면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가 곧 여섯 진관이 되어서 설사 적병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사가 패한다 할지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켰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허물어져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군제가 제승방략 체제로 편성되어 있기에] 비록 진관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사오나 그 실상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으므로, 한번 경급을 알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장수가 없는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장수 오기를 천리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가, 장수가 제때에 오지 않고 적의 선봉이 가까워지면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대중이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싸움을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다시 조종 때 마련한 진관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성룡의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제승방략' 체제가 오랜 기간 문제없이 사용되어온 전술임을 들어 그의 건의를 끝내 묵살해 버리고 만다. 훗날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의 원인이 도성에서 파견된 장수를 기다리다가 지친 지방의 군인들이 왜군의 접근에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린 데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유성룡의 선견지명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서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592년 (선조 25) 4월 13일, 대마도를 거쳐 바다를 넘어온 왜군의 공격에 부산포를 비롯한 영남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전쟁 발발 후 나흘이나 지나서야 왜군의 상륙과 잇단 패전을 알리는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은 수습책을 찾지 못한 상태로 혼란에 빠져든다.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무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이 일은 상주에서 적을 피해서 도망치고,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친 채 왜적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신립 장군이 왜군에 대항하여 수진을 치고 방어했으나 결국 패배한 충주 탄금대.

도성으로 향하는 관문인 충주에서의 패배가 서울로 전해지자, 조정과 백성은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 역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 나섰다. 왜적의 서울 입성이 임박했다는 긴박한 보고가 속속 전해지는 가운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도성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하였다. 벽제관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는 역으로 들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이 여기에서 도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시종(侍從), 대간(大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 비가 물 붓듯 쏟아졌다. 궁인들은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삽니까?"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러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기에 들어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 후 왜적은 삽시간에 평양성 부근까지 육박했다. 이처럼 왜적이 급속하게 북상해오자 피난길의 조정은 다시금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피난길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동요와 민심 이반의 심각성이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배신감이 극에 달해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가라앉히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전란 이전부터 백성들은 지배계층의 수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임시 행궁을 정한 평양성의 백성들 사이에서 임금이 평양성마저 버리고 피난을 떠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그 길을 막고는 함부로 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따라가던 재신(宰臣)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나라의 녹만 훔쳐 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느냐?"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에서 임금이 계시는 행궁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세워 소리를 지르기를, "성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우리들만 적의 손에 넣어 어육(魚肉)으로 만듭니까?" 하였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막 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들과 성문 안 조당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뜰 안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민심의 심각한 이반 현상을 기술하는 대목은 『징비록』 이곳저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평양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날 것을 재촉하였으며, 선조는 아예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평양성에서 왜적을 맞아 항전하기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대신들도 더 이상 민심의 이반을 방치해서는 위험하다는 정세판단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평양성에서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조정이 항전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 백성들의 의지를 믿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항전을 벌인다면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지만,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떠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대목이 있다.


원병의 도착과 전세의 역전


유성룡은 『징비록』의 지면 상당량을 명나라 구원병에 관한 기술에 할애하고 있다. 지면의 분량이 증언하듯이,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나라의 구원병은 실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병(天兵)'에 다름 없었다.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남해에서 거둔 이순신의 승전과 각지의 의병 봉기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주와 선천을 거쳐 국경에 인접한 마지막 피난지인 의주까지 내몰렸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명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차질 없이 조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전란 앞에서 조정의 권위가 무너져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흩어진 관군을 다시 규합하여 명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평양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왜군의 전력에 적잖이 놀란 명군 장수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군의 총사령관 이여송(李如松) 역시도 왜군의 습격 소문에 두려워하여 평양성 이남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당시 유성룡은 체찰사의 직분으로 명군에 대한 보급과 협의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종사관을 통해 명군이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이여송에게 전달했다. 거기에는 도성 수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사 항전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로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에 빠졌으므로 귀신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이 오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왜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이 비록 힘이 약하다 하더라고 명나라 구원병의 힘에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하는데 후퇴하자는 명령을 듣게 되면 필시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왜적들이 그 뒤를 타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제독 이여송은 이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징비록』에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인 이여송과 유성룡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부관의 어이없는 모함 때문에 이여송이 유성룡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려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왜적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유성룡이 명군과 왜군 사이에서 화친을 의논하는 사자들의 왕래를 방해하기 위해 임진강의 배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그것이 모함임을 알게 된 이여송이 한동안 겸연쩍어 했다는 이 이야기는, 지원군의 입장이면서도 실은 점령군이나 다름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 군사 앞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표현 그대로 울며 애원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뼈아픈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겠다.


군세를 수습한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거둔 승리와 남해 바다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 그리고 각지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유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도성에 명나라 군사가 진입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 역시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전란 발발 초기에 아무런 경황도 없이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도성이었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겠으나, 유성룡의 눈에 비친 200년 도읍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모습뿐이었다.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로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살아있는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얼굴색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과 여염집 할 것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산 밑 일대에 왜적들이 거처하던 것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 및 종루(鐘樓), 각사(各司), 관학(館學)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도성 수복의 여세를 몰아 한강 이남의 왜군을 추격하고자 했던 조정과 유성룡의 의지는 명나라 군사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선조가 평양성에서 서울로 돌아올 무렵, 명군과 왜군 사이에는 종전협상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조선의 강화 반대 목소리는 배제시킨 상태였다. 더구나 협상안에는 왜군이 조선 영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하지만 명나라 지원병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군을 몰아내기엔 군사적 역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더구나 그동안 명나라 군대의 군수품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한 징발과 부역은 한계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징비록』에 기록된 유성룡의 민생 현장에 대한 묘사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만연했으며, 명군이 먹을 군량 운반에 동원된 노인과 아이들이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대다수는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아비와 아들, 남편과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신호가 켜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종전의 뒤안길에서


도성을 수복한 관군과 명군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지구전 태세로 본격적으로 돌입한 왜군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과 숨 막히는 첩보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이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하옥 관련 부분은, 그 후반부에 소개된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에 관한 유성룡의 극진한 평가와 비교할 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일어난 사건의 경과 위주로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비판이 모함이었다거나 조정이 이중간첩 요시라의 꼬임에 속아 넘어갔다는 내용은 들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다름 아닌 유성룡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적극적인 구명활동이 『징비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의아스러운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순신에 대한 옹호가 선조의 화를 돋우어 이순신에게 더 큰 화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거나, 유성룡과 이순신 둘 사이의 사적인 친분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예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경북 안동에 있는 유성룡의 종가인 충효당.


보물 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의 후반부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하여 유성룡이 밝힌 다음의 소회는,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단순히 훌륭한 수군사령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며, 무릇 시집 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1598년 7월, 왜군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함에 따라 남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은 전의를 상실한 채 본국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종전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왜군의 대규모 함대를 맞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이 싸움을 기점으로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하여 부산, 울산, 하동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전체가 일본으로 철수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조선 조정은 7년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허한 영광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커다란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징비록』 서문에서 유성룡이 토로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화가 몰고 온 참혹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전쟁 발발 수십 일 만에 서울, 개성, 평양 이른바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고, 임금은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 이들은 무명의 백성들이었다.


"어지러운 난리를 겪을 때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그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하였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유성룡의 모습은 당대의 백성들에겐 어쩌면 때늦은 후회로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구절로 자신의 책 제목을 대신한 유성룡의 마음가짐만큼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 객관적 역사 서술은 가능한가?

역사 서술에서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하게 배제한 객관성을 구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록자 본인의 의지와는 별도로 사료의 선택과 재구성, 서술 시점의 선택 등에서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만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보여준 것과 같이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 당파심의 영향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2. 임진왜란 발발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이 심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전란 이전부터 조세와 부역을 비롯하여 백성에 대한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란이 발발하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조정의 실망스런 모습에 대한 배신감이 더해지면서 개전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 현상은 극에 달했다.


3. 『징비록』이외에 조선시대의 기록문학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하여, 병자호란의 참상을 그린 기록으로 궁녀가 집필한 『산성일기(山城日記)』,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궁중생활을 기록한 『한중록(閑中錄)』 등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록문학 작품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징비록 [懲毖錄] - 눈물과 회한으로 쓴 7년의 전란의 기록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반응형
Posted by 기자 J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기자 J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